연재 - 내가 사랑한 올드카[오토엔뉴스] : 현대 프레스토
대박 치고도 단명한 비운의 세단, 현대차 프레스토
프레스토, 국산차 최초의 앞바퀴 굴림 세단을 회상하며
“프레스토는 강하고, 빠른 차였지. 에어컨디셔닝을 켜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강원도 한계령을 오를 수 있었어. 당시엔 이런 차가 많지 않았다니까.”
[내가 사랑한 올드카] 가끔 옛날을 회상해본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추억의 장소나 가요를 따라 기억을 쫓으면 완전히 잊었던 사실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추억 속엔 자동차도 등장한다. 보통 국산 올드카를 얘기할 때 많은 이들이 현대 포니나 대우 르망 같은 차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에게 국산차의 시작점은 포니도, 르망도 아니다. 아버지의 첫차였던 현대 프레스토다.
1980년대를 살았더라도 프레스토(Presto)란 차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가 프레스토란 이름으로 차를 팔던 것이 고작 3여 년(1986년~1989년)밖에 안 된다. 프레스토는 포니 엑셀의 세단형이다. 1970년대 현대자동차는 북미지역의 수출을 목표로 프로젝트 X카를 시작했다. 주인공은 현대차의 세 번째 고유 모델인 포니 엑셀이었다. 포니의 후속을 위한 프로젝트는 기존과 달리 현대차가 자체 개발한다는 목적을 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술 부족의 한계로 이탈리아 주지아로가 디자인에 참여하고 일본 미쓰비시의 기술이 바탕이 됐다. 이렇게 1985년 세상에 등장한 포니 엑셀은 5도어 해치백을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해치백 구조에 상품성의 한계가 있다고 느낀 현대는 포니 엑셀을 기반으로 4도어 세단 모델도 구상했다. 그게 프레스토다.
포니 엑셀이 국산차 최초의 FF(앞 엔진, 앞바퀴 굴림) 소형차였다면 프레스토는 국산차 최초로 FF 방식 세단이었다. 겉모습은 당시 유행하던 주지아로 디자인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 앞머리는 뾰족한 형태로 보닛이 앞으로 급하게 떨어지게 디자인됐다. 동시에 A-B-C 필러를 최대한 세워 차체 강성을 유지하고 넓은 실내 공간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포니 엑셀의 레이아웃을 바탕으로 한 만큼 트렁크는 차의 앞모습과 다르게 앙증맞은 크기고 볼록 튀어나왔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엔진 룸과 실내, 트렁크가 제각각 기준으로 붙은 듯하다.
프레스토는 초기 1.5L 엔진을 얹어 87마력(12.5kg·m)을 발휘했다. 이후 1.3L(77마력/11.0kg·m)도 추가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변속기는 수동 4단이 기본, 자동 3단 변속기가 옵션이었고 이후 수동 5단 변속기도 추가됐다. 당시 한국엔 자동차 안전/성능 기준이 낮거나 부족했다. 그래서 모든 안전/성능을 미국 기준에 맞춰 끌어올렸다. 1986년에는 5마일(미국 기준) 충격 방지 앞뒤 범퍼, 새로운 디자인의 라디에이터 그릴이 달린 미국 수출형인 AMX 트림을 선보였다. 1987년에는 전동식 선루프와 자동형 카세트테이프, 스테레오 오디오가 장착된 ETR 모델도 등장했다.
나에게 프레스토의 추억은 부분적인 기억의 조각과 같다. 하지만 그 시대, 그 차의 시각적 특징과 촉감은 여전히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엔진룸, 실내, 트렁크가 정확하게 나뉜 3박스 스타일. 캐릭터 몰딩 라인에 붙은 빨간색 스티커. 고급스럽고 당당해 보이던 두꺼운 C필러가 인상적이었다. 차 문을 여닫을 때 쇠끼리 부딪치며 ‘찰칵’거리던 마찰음, 부분 세무 재질이 포함된 시트, 밝은 검은색 플라스틱 내장재 실내도 잊을 수 없다.
프레스토는 판매 실패로 사라진 차가 아니다. 오히려 대성공을 거뒀다. 1988년 7월, 현대차는 포니 엑셀과 프레스토를 포함하여 100만 대 생산(내수 수출 포함)을 이뤄냈다. 하지만 프레스토란 이름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1989년에 풀 모델 체인지를 거친 2세대 엑셀(세단)의 등장에 따라 서브 모델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는 프레스토라는 차의 존재로 친구들과 꽤 여러 번 다퉜던 기억도 있다. ‘포니와 같은 차’라거나, ‘세상에 없는 차’라거나 하는 어린이들의 제한된 정보가 바탕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꼭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다. 강원도 한계령(구길)에서 프레스토를 직접 운전해보는 것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태영
김태영 칼럼니스트 : 중앙일보 온라인 자동차 섹션을 거쳐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 <자동차생활>, <모터 트렌드>에서 일했다. 현재는 남성지 <에스콰이어>에서 남자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주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