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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내가 사랑한 올드카[오토엔뉴스] : 기아 브리사

욘니 2018. 5. 9. 15:40


※ 출처 : 다음 자동차





신기하게도, 묵직한 포니보다 브리사가 더 마음에 들었다





산들바람처럼 달리는 브리사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아 브리사

[내가 사랑한 올드카]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자동차에 관한 어릴 적 기억 가운데에는 유독 오래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나의 유년기인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자가용이 흔치 않던 시절이고, 서울에 살면서도 자동차를 타는 경험은 버스를 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집에 첫 차가 생긴 것도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었으니, 어쩌다 경험하는 승용차도 택시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도 택시요금이 부담스러웠던 탓에 평소에는 타는 일이 드물었고, 명절에 경의선 금촌역에서 큰댁까지 들어가는 길에 가끔 타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시 택시는 거의가 기아 브리사 아니면 현대 포니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자동차를 경험한 기억은 브리사와 포니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나 다름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포니는 참 대단한 차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건 나중에 차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찾아본 정보들이 의미를 강화한 것이니 순수한 어릴 적 기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그때 기준으로도 브리사보다 넓고 현대적인 실내와 대중차이면서도 꽤 앞선 디자인은 기억에 꽤 깊은 흔적을 남겼다. 거리에 흔한 4도어 세단 말고도 동네에서 종종 3도어 해치백과 왜건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자동차의 다양성을 생각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포니가 남긴 묵직한 기억과는 달리, 차가 주었던 좋은 느낌의 강렬함은 신기하게도 브리사 쪽이 더 컸다.

기아 브리사

브리사 4도어 세단인 S-1000의 판매가 시작된 것은 1974년. 그보다 한 해 앞서 B-1000이라는 이름의 픽업트럭부터 생산된 브리사는 기아가 만든 첫 승용차였다. 핵심 경쟁 모델이라 할 수 있었던 포니는 브리사 S-1000보다 1년 정도 늦게 생산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 아주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순전히 디자인만 놓고 보더라도 두 차가 주는 느낌은 크게 달랐다. 포니는 한창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갖춰 나가고 있던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손에서 탄생한 직선 위주의 스타일로 시대 흐름을 이끌었다.

반면 브리사는 1960년대 느낌이 남아 있는 곡선과 곡면 중심의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브리사의 원형은 기아의 제휴선인 마즈다의 소형차 파밀리아였고, 마즈다가 제공한 도면을 바탕으로 국산화한 브리사에는 자연스럽게 당시 3세대에 접어든 파밀리아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옮겨졌다.

마즈다 파밀리아

당시 마즈다 차들의 디자인은 다른 일본차 브랜드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비슷한 시기나 좀 더 이른 시기의 유럽차 분위기가 났다.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고 수출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일본차 업체들은 미국차나 유럽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완성도 낮은 디자인을 보완하기 위해 유럽차 디자인을 참고하거나 아예 유럽의 유명 디자이너 또는 카로체리아(간단히 말하면 외주 디자인 업체)에게 디자인을 맡기기도 했다. 파밀리아는 디자인 외주를 주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면서도 전반적 분위기는 1960년대 이탈리아 소형차 분위기가 물씬했다.

마즈다 파밀리아

디테일에 치중하다가 전체적 조화가 흐트러지는 일본차 디자인의 고질병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파밀리아의 한국판인 브리사는 조금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는 했어도 세련되고 균형 잡힌 디자인이 매력이었다. 실내도 마찬가지여서, 위쪽이 튀어나오고 아래쪽이 들어간 대시보드와 파묻히듯 안으로 들어가 있는 계기, 단순하기 그지없는 스티어링 휠, 비스듬히 기울어져 앞좌석 쪽으로 뻗어 나온 기어 레버 같은 것들은 뭔가 포니보다는 오래되어 보이기는 해도 좀 더 스포티한 분위기였다. 포니보다 차가 작은 탓에 뒷좌석은 상대적으로 더 답답했지만, 좌석 쿠션은 좀 더 편안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나온 S-1000에 1.0리터(985cc) 62마력 엔진이 올라갔던 브리사는 나중에 1.3리터(1,272cc) 87마력 엔진이 올라간 S-1300이 더해졌다. 어느 쪽이든 통통 튀기는 듯한 배기음과 가볍게 느껴지는 가속감과 승차감은 뒷자리에 탄 상태에서도 왠지 운전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포니의 승차감이 좀 더 안정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나는 브리사의 경쾌한 움직임에 더 끌렸던 모양이다. 2차 석유파동 즈음이었던 만큼, 브리사가 ‘기름 덜 먹는 차’라는 이야기를 택시 기사분들에게서 가끔 들었던 기억도 난다. 나중에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로 기아가 승용차 생산을 못하게 됐을 때, 만들어놓고 차에 올리지 못한 1.3리터 엔진을 새한/대우자동차가 사다가 맵시에 얹었다고 하니 실제로도 연비가 좋았던 모양이다.

영화 <택스운전사> 스틸컷

지난해 영화 <택시운전사>에 주인공이 모는 택시로 브리사가 나온다고 해서 무척 궁금해 하기도 했다. 좀처럼 문화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탓에 결국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국내에 멀쩡히 남아 있는 차도 드문데다가 영화촬영용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원형이 된 마즈다 파밀리아를 바탕으로 다른 차들의 부품을 짜깁기 해서 거의 자작에 가깝게 달릴 수 있는 차를 만들었다는 매체 기사를 보고는 아쉬움이 컸다. 개인적으로도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차인 만큼 상태 좋게 보존되어 신나게 달리는 브리사가 남아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기아 브리사

개인적 추억도 추억이지만, 브리사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도 중요하기 때문에 잘 보존된 차가 남아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즈다 파밀리아는 일본 기준으로는 평범한 소형차였고 일본에서는 토요타 코롤라와 닛산 서니의 경쟁에 묻혀 제 값어치를 인정받지 못한 차이기도 했다. 그러나 파밀리아의 이복형제인 기아 브리사는 비록 도입모델이기는 해도 단순조립에 그치지 않고 엔진을 비롯해 부품 국산화율이 가장 높았던 승용차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차라는 의미가 크다. 몇 년 전만 해도 아쉽게나마 복원을 거쳐 움직일 수 있는 브리사를 이따금 볼 수 있었다. 언젠가는 좀 더 깔끔하고 번듯한, 산들바람이라는 이름처럼 활기차게 달리는 브리사를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류청희

류청희 칼럼니스트 : 월간 <비테스> 편집장, 웹진 <오토뉴스코리아 닷컴> 발행인, 월간 <자동차생활>, <모터매거진> 기자를 거쳐 현재 자동차 평론가 및 자동차 전문 번역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