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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카/내가 사랑한 올드카

연재 - 내가 사랑한 올드카[오토엔뉴스] : 기아 콩코드

by 욘니 2018. 5. 20.


※ 출처 : 다음 자동차





쏘나타 잡기 위해 기아가 내놓은 야심작 콩코드를 추억하며




내 인생의 첫 차 맵시나와 콩코드, 그리고 아버지

[내가 사랑한 올드카] 정말 그랬다. 대학도 대학이지만, 우리동네에서는 동네 명문고등학교 들어가는 게 먼저였다.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1~2학년은 저녁 9시까지, 3학년은 10시까지. 예외는 없다. 물론, 다음날 종아리 몇 대 맞을 각오로 탁구장으로 땡땡이 치던 친구들이 있긴 했고, 버스가 일찍 끊기는 시골 사는 친구들은 조금 일찍 가긴 했다. 땡땡이 친구들의 대범함에 속으로 박수를 쳤고, 시골 사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콩코드. 간혹 캐피탈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야간자율학습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역 명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바로 시작했다. 야간자율학습을. 고등학교 1~2학년은 저녁 10시, 3학년은 12시까지였다. 예외는 없다. 물론, 책상을 슬쩍 베란다로 치우고 영화관으로 땡땡이 치던 친구들이 있었고, 버스가 일찍 끊기는 시골친구들이 조금 일찍, 그러니까 8시 30분 전에 학교를 벗어났다. 용감한 친구들이 부러웠고, 나도 먼 곳에 살고 싶었다. 명문고등학교까지는 걸어서 20분. 당시, 동네 어느 곳에 살아도 40분이면 도착하는, 지방의 작은 도시다(우리들은, ‘언제 시골에 내려가’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엄연한 인구 15만 명의 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고 12시 퇴근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승용차를 구입했다. 대우 맵시나, 그것도 당시 최고급형 하이 디럭스. 물론 중고차다. 거금 40만 원을 투자한 걸로 기억한다. 우리집 첫차였다. 세단은 세단인데, 살짝 둥글린 모습이 귀여웠다. 로얄 살롱의 축소판이었다. 1.5리터 가솔린엔진에 수동 4단.

정신 없는 고3에,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중2 아들을 둔 우리집. 주말만 되면 인근으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여드름 투성이에, 목소리 이상한 남자애들이 뭐 그렇게 가족여행을 좋아했겠는가? 두 명(부모님)만 떠들고, 두 명은 먼 산만 바라보다 돌아오는 드라이브였다. 물론,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한 날이면, 네 명 모두 묵언수행만 하다가 귀가했다.

그런데 사실, ‘맵시나 하이 디럭스’는 가족여행용 차가 아닌, 나의 ‘퇴근용 자동차’였다. 12시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신경 까칠한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정확히 11시 30분 학교 앞에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10분 동안 말은 거의 없다. 시험은 잘 봤는지, 성적은 잘 나왔는지, 대학은 결정했는지, 궁금하실 법도 하지만, 끝끝내 한 번 묻지 않았다. 가끔 필요한 거 사라며 엄마 몰래 용돈만 주셨을 뿐이다.




세단이면서도 귀여운 외모가 돋보였다. 맵시나 하이 디럭스 

     

아버지는 1년 내내, 나의 한 밤 퇴근을 위해,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S-클래스도 아니었고 팬텀도 아니었지만, 맵시나는 나 혼자 뒷좌석을 영유했던 최고의 쇼퍼 드리븐이었다. 운전기사는 아버지였고. 지금 생각해본다. 고3이라고, 대학에 가야 한다며 유세깨나 떨던, 툴툴거림이 일상생활이었던, 절정의 사춘기 아들을 둔 아버지. 얼마나 한 대 쥐어박고 싶었을까? 감사합니다.

제대 후 고향에 내려갔지만 집 잃은 까마귀였다. 내가 나라를 지키고 있는 사이 이사를 했던 것. 터미널에 도착해 전화를 하니 검은색 세단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앞에 선다. 아버지께서 직접 오셨다. “야! 타.” 제대한 병장의 충성 외침은 들리는 둥 마는 둥, 화제는 자동차 이야기였다.

당시 쏘나타를 경쟁모델로 삼아 기아에서 내놓은 야심작, ‘콩코드’였다. 기아 캐피탈과 비슷한 생김새로 헷갈리기도 했지만, 윗급이었다. 각진 차체를 유연하게 디자인했고, 견고해 보이는 촘촘한 라디에이터 그릴도 인상적이었다. 맵시나 하이 디럭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군에서 운전병으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콩코드 키를 요구했다. 아버지는 거부. 몰래 차를 끌고 나갈까 걱정이 든 나머지, 평상시 걸어서 출근하셨던 아버지가 차를 몰고 가신다. 내가 핸들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은 주말, 그것도 넓디넓은 공터에서다. 운전병 출신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다. 옆에 꼭 같이 타신다. 자존심 상했다. 운전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며 폭풍 잔소리다. 또 자존심 상해서 버스 타고 집에 간다며 차에서 내렸다. 혼자 차 몰고 유유히 가신다. 자존심 엄청 상했다.





사진첩에서 이 사진 찾느라고 목디스크 걸릴 뻔 하셨단다          


머리를 썼다. 퇴근 후를 노렸다. 책상서랍에 있는 보조키를 손에 넣었다. 밤 12시. 콩코드는, 시동이 걸린 듯 만 듯, 너무나 조용했다. 이전까지 군용 지프(1/4톤)만 몰던 운전병에게, 콩코드는 첨단장비 집합체였다. 윈도, 트렁크, 라디오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자동이었다. 밤새 운전했고, 들키지 않기 위해 기름까지 채워 넣었다.

바퀴벌레 인생이 되었다. 밤만 되면 기어 나갔다. 바퀴벌레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끼리 모인다는 것. 그냥 친구들 얼굴만 봐도 좋을 나이에, 차까지 생겼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렇다고 액셀페달을 끝까지 밟으며 스피드를 즐겼던 건 아니고, 오렌지족 놀이를 했던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차를 모는 게 좋았고, 앞뒤에 친구들 태우고 어디로든 가는 게 행복했다. 밤 12시 10분, 농협 앞이 접선장소였다. 동네 가까운 청풍호 드라이브부터, 강릉도 다녀오기 일쑤였다. 당시 최고출력 110마력에 최대토크 17.0kg·m에 0→시속 100km 가속은 11.5초였다(예전 정보 찾아서 알아낸 수치다). 그리고 수동기어였다. 무엇보다도 디지털 계기반이 백미였다. <전격Z작전>의 키트처럼 차곡차곡 빠르게 올라가는 속도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0에서 시작해 160까지 모든 숫자를 읽어가며 속도를 올릴 때의 짜릿함이란….

우리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150킬로미터 거리는 쉽게 오갔다. 물론, 새벽 5시 전에는 집앞에 조용히 세워놓았다. 기름 채워 넣는 건 기본, 세차도 바퀴벌레들이 깔끔히 해냈다. 근 한 달 동안 완전범죄도 이런 완전범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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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 중인 친구 면회를 가기 위해 콩코드를 하루 타면 좋겠다고 아버지께 정식으로 요청했다. 군에서 운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웠고, 엔진원리까지 그려 넣은 PT자료까지 만들어 설명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다. 예상과는 다르게 흔쾌히 오케이다. 운전조심 하라는 말씀과 함께 거액의 기름값까지 하사. 좋아 뛰어나가는 내 뒤통수 대고 한 마디 더 하신다.

“야! 너네 담배 끊어. 밤새 차에서 담배 피고, 그걸 10분 만에 없애려고 하니 냄새가 없어져?”

“아버지 지난번 처음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처음이라고? 지지난주에는 성모 여자친구도 같이 탔었잖아.”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우리들이 몰래 차를 몰고 나갔던 것을. 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다, 바퀴벌레 멤버뿐만 아니라 여자친구가 누구인지까지. 얼마나 한 대 쥐어박고 싶었을까? 감사합니다.

나의 첫차는 ‘맵시나 하이 디럭스’였고, ‘콩코드’였다. 맵시나 하이 디럭스는 운전기사를 둔 퇴근용 첫차였고, 콩코드는 오너 드라이브의 맛을 알게 해준 첫차였다. 그리고 내 첫차 옆에는 항상, 지금은 중고 코란도 오너인 아버지가 계셨다.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면, 아버지 몰래 코란도 끌고 나가 오프로드나 한번 누벼볼 생각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최윤섭

최윤섭 칼럼니스트 : <자동차생활>,<톱기어>,<카> 등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나름 무도인을 꿈꾼다. 첫 대회 1회전 탈락 후 시름에 빠지기도 했다. 슬픈 예감보다 기쁜 예감이 들어맞기를 바라는 나이가 됐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뱉기도 하지만... 현재 <오토엔뉴스>에서 몇 글자 끄적거리고 있다.